인간 사회의 법보다 상위에 있는 법이 천법이다.
그 어떤 법도 천법에 저촉되는지를 살펴본다면, 사형제도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법이 무엇이고 어떤 기능을 하는지 그런 원론적인 답변은 제쳐두고, 과연 법이 누군가를 심판할 수 있는 것인지 그 '무결성'과 정확성을 생각해봐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그 법이라는 것 또한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천법이 심판의 대상이 된다면, 그 완전 무결성은 애초부터 없던 것이다. 누가 누구를 심판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신이 인간을 심판한다는 전제를 세워본다면, 이미 그 무결성이 깨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신이 이 우주를 창조한 목적에 어긋나는 파괴행위,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고, 인륜을 파괴하는 행위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인간에게 죄를 묻겠는가? 여기에 칼빈의 절대 예정설을 대입해보면 이 문제는 확연해진다. 미래가 이미 정해진 것이라면, 신 마음대로 소설을 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소설 속에 꼭두각시 인형처럼 살아가는데 무슨 법이 필요하고, 심판 따위가 필요하겠는가? 이 우주를 창조한 목적이 소설을 쓰는 것이고 그것만으로 완전무결한 그 자체인데 말이다. 이미 그렇게 정해놓은 것을 가지고 법이라는 고상한 것을 만들어서,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심판하는 심판주(審判主)라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부정(否定)을 부정(否定)하면 긍정의 '참'이 나온다.
절대적으로 예정된 미래라는 것을 부정하고,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행위가 합당한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책임'이 따르는 자유라고 한다면, 이 얘기는 180도 달라진다. 즉, 이 말은 신에게도 저촉되는 책임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냥 대충 자기 기준에서 법을 만들어 놓고 심판하겠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우주를 만드는 것도 대충할 수 없다. 인간의 지적 수준을 초월하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정교한 작품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입한 최고의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그래야만 이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로서 권위와 책임에 대한 정당성과 명분이 서는 일이다. 따라서 자연계에서 인간이 최고로 우월한 존재는 아니지만, 자연을 책임지고 관리하고 다스릴 수 있는 주인 된 입장에 세울 수 있는 책임 있는 존재로서 인간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일이다. 신도 인간에게 책임을 다해야 하고, 인간에 대해서 신을 닮은 신격? 인격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신 자신도 책임으로부터 완전무결하지 않으면서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모순이기 때문이다.
신은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존재인가?
신이 그러하듯 인간에게도 책임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대부분의 인간 행위는 바로 인간의 책임이다. 인간 자신의 몫이다. 따라서 신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지옥이라는 것도 만들지 않았고, 심판할 생각도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결코, 뒤도 돌아볼 이유가 없다. 오직 완전무결한 존재로서 그의 하는 일도 절대적으로 그래야만 한다. 지옥이라든지 악(惡)이라는 것도, 그런 관념조차 없어야 한다. 그런 관념이 존재한다면, 이미 신은 그런 것을 스스로 원칙과 법으로 천명한 모순적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선(善)이라는 하나의 관념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이에 상반(相反)되는 악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봐야 한다. 즉, 상대(相對)적인 개념은 존재하더라도, 이에 상반되는 개념은 없는 것이다. 확고한 신의 목적에 반하는 다른 목적의 개념은 없다. 그의 창조목적은 오직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을 끊고 헤치는 법은 천법에도 없다.
천법에도 없는 사형제도가 신의 뜻과 같다고 볼 수 있을까? 악법도 법이라는, 죄악 된 인간 사회에서는 필요할 수는 있다. 정당방위 차원에서 사람의 목숨을 끊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혹은 타국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살생도 가능하다. 물론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거나 저울질할 수는 없지만, 또 다른 생명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살생은 불의에 맞선 결과이기 때문에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는 있다. (다만, 살생을 법으로 용인한 것이 아님) 이렇듯 살생은 동등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일 뿐, 법의 잣대가 인간 생명을 심판할 기준을 넘어서 존재할 수는 없다. 따라서 법에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 또한, 죄를 짓고도 전혀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겠고, 아무리 정당방위로 인한 우발적인 살인을 했어도 평생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이들을 심판할 수 있겠는가? 단지 사회 격리를 통해서, 지옥 같은 환경에서, 범죄자의 죄를 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그들 스스로가 임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외적인 구속이나 심판이 아니라 진정한 심판은 내적인 양심에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법은 완전하지 않지만, 현재로서는 악법도 법의 가치로 기능해야 하는 그러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명확하지 않은 채 모두가 살기 위해서 해서는 안 되는 죄도 짓고 있는 그 어디쯤 머물러 있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이것은 과거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앞으로 우리가 바꾸어가야 할 책임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것이 싫다고 악법에(필요한 법) 반하는 행위나 시위를 하는 망나니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무책임한 자들이다. 개인의 책임은 물론, 국가적 책임과는 동떨어진 자들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할 수는 있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이다. 개인의 책임 여하에 따르는 자범죄(自犯罪) 차원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몰랐을 뿐이지 우리에게는 이미 그만한 죄도 있을 수 있고, 책임도 있다. 따라서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종교적 규율을 따르는 것만이 양심은 아니다.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연대적인 책임을 알면서도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양심에게 질문해야 한다. 양심을 일깨울 수 있는 사회, 스스로 양심이 기준이 되는 책임 있는 사회가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이다.